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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엔화가 안전자산에서 휴지조각 취급받는 이유

수출로 외화 벌던 일본 경제 구조 변화…제조업 경쟁력도 예전만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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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글로벌 금융시장이 흔들릴 때마다 투자자들이 찾던 대표적인 안전자산이 엔화였다. 그러나 최근 엔화가 장기간 약세를 보이면서 과거의 위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유튜브 채널 ‘머니인사이드’에 출연한 박정호 명지대학교 실물투자분석학과 교수는 엔화 약세의 배경을 단순히 환율이나 금리 문제만으로 볼 수 없다고 설명했다.

가장 근본적인 변화는 일본 제조업의 경쟁력 약화다.

20세기 일본은 세계적인 수출 강국이었다. 자동차와 전자제품을 비롯한 일본 제품이 세계 시장에서 팔릴수록 일본으로 막대한 외화가 들어왔고, 이는 자연스럽게 엔화 가치를 뒷받침하는 힘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산업의 중심이 디지털과 AI 등으로 빠르게 이동하면서 과거와 같은 압도적인 제조업 경쟁력을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여기에 일본 기업들의 해외 생산 확대도 엔화의 구조적인 변화를 만들었다.

과거 일본 기업들은 엔화 가치가 지나치게 오르는 ‘엔고’에 대응하기 위해 생산시설을 해외로 옮기기 시작했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서 해외 생산이 일본 기업들의 일반적인 경영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는 점이다. 일본 기업이 해외 공장에서 제품을 생산해 현지나 제3국에 판매하면 기업 실적은 좋아질 수 있지만 과거처럼 수출 대금이 고스란히 일본으로 들어오는 구조는 약해진다.

해외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다시 현지 공장이나 사업에 투자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일본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돈을 벌더라도 그 돈이 일본으로 돌아와 엔화 수요를 늘리는 효과는 과거보다 제한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박 교수는 “해외에서 만들어서 해외에서 바로 파니까, 수출은 잘해도 정작 일본 본토에는 외화가 들어오질 않는 거예요”라고 설명했다.

장기간 이어진 초저금리 정책도 엔화 약세를 부추긴 핵심 요인이다.

일본은 오랜 기간 침체된 내수와 디플레이션 문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우 낮은 수준의 금리를 유지해왔다. 시중에 돈을 공급하고 소비와 투자를 늘리기 위한 정책이었지만 환율 측면에서는 엔화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결과로 이어졌다.

돈을 맡겨도 받을 수 있는 이자가 적다면 투자자 입장에서 엔화를 보유할 유인이 줄어든다. 반대로 미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의 금리가 상대적으로 높아지면 자금은 더 높은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곳으로 움직이게 된다.

엔저가 장기화하면서 일본 경제에는 또 다른 부담도 생겼다. 일본이 해외에서 석유와 철광석 등 원자재를 사들이기 위해서는 외화가 필요한데, 엔화 가치가 떨어질수록 같은 물건을 수입하는 데 더 많은 엔화를 지불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엔저가 수입 가격 상승을 통해 일본 내 물가 부담으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다.

특히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이가 커지면서 ‘엔 캐리 트레이드’도 활발해졌다.

엔 캐리 트레이드는 금리가 낮은 일본에서 엔화를 빌린 뒤 이를 다른 통화로 바꿔 금리가 더 높거나 기대수익률이 높은 해외 자산에 투자하는 방식이다.

박 교수는 “일본 금리가 너무 낮으니까 투자자들이 일본에서 싼 이자로 엔화를 빌려서 금리 높은 미국 같은 나라에 투자하는 것”이라며 이러한 거래가 엔화 매도와 환율 변동성을 확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내부의 구조적인 문제도 남아 있다.

고령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높아지면 가계는 소비보다 저축을 선택하기 쉽다. 기업 역시 적극적으로 투자하기보다 현금을 확보하려는 성향이 강해질 수 있다. 자연재해에 대한 우려까지 겹치면서 가계와 기업이 지갑을 쉽게 열지 않는 구조가 경제 활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이 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이처럼 엔화의 위상 변화는 단기적인 환율 요인이라기보다 일본 경제 구조 전반의 변화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결국 엔화가 과거처럼 ‘위기가 오면 무조건 오르는 통화’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워진 것은 일본 경제가 돈을 벌고, 투자하고, 자금을 움직이는 방식 자체가 과거와 달라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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